
밀크T 친구들 안녕!
초등학교 최고의 인기송인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함께 부르며 역사 속 인물들을 찾아 떠나요!
#한국을빛낸100명의위인들 #초등역사 #위인송 #역사송
-밀크T 초등이 궁금하다면? https://www.milk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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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만주 벌판 달려라 광개토 대왕
신라 장군 이사부
백결 선생 떡방아
삼천 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2절
말 목 자른 김유신 통일 문무왕
원효대사 해골물 혜초 천축국
바다의 왕자 장보고 발해 대조영
귀주 대첩 강감찬 서희 거란족
무단 정치 정중부 화포 최무선
죽림칠현 김부식
지눌 국사 조계종 의천 천태종
대마도 정벌 이종무
일편단심 정몽주
목화씨는 문익점
해동공자 최충 삼국유사 일연
역사는 흐른다
3절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의 말씀 받들자
황희 정승 맹사성 과학 장영실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
십만 양병 이율곡 주리 이퇴계
신사임당 오죽헌
잘 싸운다 곽재우 조헌 김시민
나라 구한 이순신
태정태세문단세
사육신과 생육신
몸 바쳐서 논개 행주 치마 권율
역사는 흐른다
4절
번쩍번쩍 홍길동 의적 임꺽정
대쪽 같은 삼학사 어사 박문수
삼년 공부 한석봉 단원 풍속도
방랑 시인 김삿갓 지도 김정호
영조 대왕 신문고 정조 규장각
목민심서 정약용
녹두 장군 전봉준 순교 김대건
서화 가무 황진이
못 살겠다 홍경래
삼일천하 김옥균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
역사는 흐른다
5절
별헤는 밤 윤동주 종두 지석영
삼십삼인 손병희
만세 만세 유관순 도산 안창호
어린이날 방정환
이수일과 심순애
장군의 아들 김두한
날자꾸나 이상 황소 그림 중섭
역사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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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00 great men of Korea)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합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남겨진 물건이나 건축물 등을 통해서
이 시대를 연구하죠 ^^
선사시대는 사용했던 도구에 따라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를,
신석기 시대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했답니다
#홍진경 #라엘이역사만화 #석기시대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를
'청동기 시대'라고 합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큰 돌을 둘러 세운 뒤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만듭니다.
돌위에 돌을 고였다고 하여 '고인돌'이라 이름 붙었지요.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가난함과 부유함, 힘이 세고 약함에 따라
계급이 생겨 사람들 간의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무렵 단군왕검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이라 불렀으나, 이후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 자를 붙여 '고조선'이라 부르지요.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며,
중국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철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를 철기시대라고 합니다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꽃피우던 고조선은 중국에서 철기를 받아들인후
본격적인 철기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철기는 청동기에 비해 비교적 재료를 구하기 쉽고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농기구와 무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부여는 만주의 평야지대에 자리했던 나라로,
왕은 중앙을 다스리고 '사출도'로 나뉜 네개의 구역을
각각 마가,우가,구가,저가라는 부족장들이
다스리는 연맹왕국이었습니다
농업과 목축이 발달하여 만주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였지만,
점차 세력이 약해지다가
494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하였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주몽은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이름입니다
어릴적부터 무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습니다
부여의 왕자들에게 시기를 받자,
부여를 떠나 졸본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나라가 바로 '고구려' 입니다
주몽의 출생과 즉위에 관한 신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온조는 본래 고구려의 왕자였습니다.
하지만 부여에서 온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위협을 느껴 형 비류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온조는 위례성에 터를 잡아 나라를 세웠고,
이 나라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 나라가 바로 '백제'입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로 유명합니다. 박 모양의 알에서 나왓다는 뜻에서 박씨 성이 붙고,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박혁거세는 사로국의 여섯 촌장들에 의해 당시 왕을 뜻하는 '거서간'으로 추앙받으며 서라벌(신라의 옛이름)을 세웠습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박혁거세
가야는 낙동강 유역의 여섯나라가 연맹하여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여섯 나라 중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연맹을 이끌었지요
초기의 가야 연맹을 이끈 사람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으로
그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내려 준 황금알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태어났다는 신화가 전해집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가야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제 19대 왕으로,
제 17대 왕인 소수림왕이 닦은
정치적 안정과 기틀을 기반으로
대규모 정복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요동과 만주,
남쪽으로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지요.
그 결과 광개토대왕은 한민족 최고의 정복 군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홍진경 #광개토대왕 #역사만화
장수왕은 광개토 대왕의 맏아들로, 고구려의 제20대 왕입니다.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웠고,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쳐 남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98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약 80년간 고구려를 이끌어서 ‘장수왕’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장수왕
무덤 안의 벽면이나 천장에 그리는 그림을 ‘고분 벽화’라고 합니다.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에서도 고분 벽화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 사회의 여러 모습 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중국 만주 길림성에 있는 ‘무용총 벽화’입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고분벽화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고,
화랑도를 국가 공식 단체로 편성했으며
역사책인 《국사》를 편찬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지요.
진흥왕의 업적은 영토 확장을 기념하며 세운
여러 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진흥왕
신라 시대 때 청소년으로 이루어졌던 수련 단체를 ‘화랑도’라고 합니다.
꽃을 일컫는 ‘화(花)’ 자와 사내를 뜻하는 ‘랑(郞)’ 자로 이루어진 화랑은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입니다. 집안이 좋고 외모가 단정하며,
품행이 곧은 소년들이 모여 각종 교육과 군사 훈련을 받았지요.
전쟁 시에는 전쟁터에 나가 신라를 위해 싸우기도 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화랑도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무령왕릉은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덕분에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알 수 있었지요.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물과 도자기, 칼 등 4,600여 점에 이르는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무령왕릉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 대향로는 전체 높이 약 60cm,
최대 지름 약 20cm에 달하는 대형 향로로,
도교와 불교의 요소가 조화롭게 담긴
백제의 걸작입니다.
뚜껑 장식과 뚜껑, 몸통과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모습이 정교하면서도 뛰어나
백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공부왕찐천재
선덕 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제26대 왕인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맏딸이었던 그녀가 왕위에 올랐지요.
선덕 여왕은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으며,
천문 기상 관측대인 ‘경주 첨성대’를 세워
신라의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선덕여왕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양제(수나라 2대황제)는 점차 영토를 넓혀 갔습니다. 그 야욕은 고구려에도 뻗쳤지요. 그리고 612년, 무려 113만 명이 넘는 수나라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습니다.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을지문덕은 치밀한 전술을 세워 살수(‘청천강’의 옛 이름)에서 30만여 명의 수나라군을 격파했습니다. 당시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가 겨우 몇 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구려의 큰 승리였지요. 이 싸움을 ‘살수 대첩’이라고 합니다.
진경 #역사만화 #공부왕찐천재
신라의 뛰어난 장수인 김유신은 본래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었지요.
김유신은 15세 때 신라의 화랑이 되어 수련 과정을 거쳤고,
이후 여러 전투에 나가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김유신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입니다.
백제를 정벌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 땅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는 동해의 대왕암에서 치러졌는데,
여기에는 문무왕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698년 만주 지방에 세운 나라입니다.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던 점, 발해 왕이 스스로를 ‘고려 국왕’이라
칭했던 점, 온돌과 무덤 구조가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점 등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발해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교 유적입니다.
불국사는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절로, 이곳에서는 ‘석가탑′과 ‘다보탑′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쌓아 만든
석굴 사원으로, 잔잔한 미소를 짓는 본존불상이 위치해 있지요.
두 유적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홍진경 #역사만화 #불국사 #석굴암
장보고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떨친 통일 신라 시대의 장군입니다.
당나라에 건너가 군인으로 세력을 펼치다가,
해적들에 의해 노예로 사고팔리는
신라인들을 목격하고 곧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무찌르고,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신라 말, 진골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다툼으로 신라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왕권은 물론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도 약해졌지요.
이에 따라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를 ‘호족’이라고 합니다. 호족들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우기도 했는데,
그 나라가 바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입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왕건은 고려를 세운 ‘태조’의 이름입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포악한 정치를 펼치자,
그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습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흡수하여
새로운 통일 국가 시대를 열었지요.
왕건은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세금을 낮추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지방에서 세력을 펼치던 호족들을 통합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해 북진 정책을 추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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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고려의 제4대 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왕건이 시행했던 호족과의 결혼 정책이 훗날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이어지며
왕권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였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의 색깔을 정하는 등 다양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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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외교가입니다.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찾아가
외교 담판을 벌인 서희는 거란과 국교를 맺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고려에서 철수시키고, ‘강동 6주’를 획득했습니다.
서희의 빛나는 외교술 덕분에 고려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인
강동 6주를 차지함은 물론,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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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1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이에 거란은 두 차례 더 고려를 공격해 왔어요. 하지만 고려는 그때마다
거란의 공격을 잘 막아 냈습니다. 이때 일어났던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귀주 대첩’입니다. 고려의 장군,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며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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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은 고려의 장군이자 문신입니다.
여진족이 고려를 공격하자,
윤관은 숙종에게 건의해 ‘별무반’을 조직했습니다.
별무반은 여진족의 기병을 대적하기 위해 만든 특수 부대로,
기병ㆍ보병ㆍ승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섰으며,
마침내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지방에 9개의 성,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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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입니다.
그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국가와 왕실의
부흥을 위해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제안했지요.
인종도 처음엔 천도를 허락했습니다.
문벌 귀족의 권력 독점과 이자겸의 난 등으로 인해
왕권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서경 천도는 개경파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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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왕명에 따라
김부식이 펴냈습니다. 삼국의 역사적 사실을 성격에 따라 나누어 기록했지요.
반면《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로,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 신화와 민간 설화, 고조선의 역사 등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역사만화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고려청자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푸른빛의 자기를 뜻합니다. 무늬가 없는
‘순청자’와 무늬를 새긴 ‘상감 청자’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나, 고려 사람들은 독창적인 기술을 발전시켜 고려청자를
탄생시켰습니다. 중국 송나라 사람이 고려청자는 ‘천하제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청자는 고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역사만화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고려는 문신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신들은 문신들보다 지위가 낮았으며, 여러 차별 대우에 시달려야 했지요. 이에 불만을 느낀 무신들이 1170년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왕을 교체했습니다. 이를 ‘무신 정변’이라 합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무신들이 고려의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 시기를 ‘무신 정권’ 시기라고 합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무신 정권 시기에는 하층민이 중심이 된 많은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농민들은 지배층의 극심한 수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노비와 같은 천민들은
신분 해방을 꿈꿨지요.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도 다른 노비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키려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당시 하층민의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인쇄를 하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활자를 ‘금속 활자’라고 합니다.
금속 활자를 판에 나열한 다음 먹물을 발라 종이에 찍어 내는 것을
‘금속 활자 인쇄술’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는 고려 때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냈으며, 금속 활자로 찍어 낸 책 중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는《직지심체요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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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는 고려 후기의 승장으로,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에 맞서 여러 활약을
펼쳤습니다. 승장은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의 장수를 뜻합니다.
김윤후는 관리들이 지키지 않고 도망간 ‘처인성’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몽골군에
대항해 큰 승리를 얻었으며, 계속된 전쟁에 백성들이 지쳐 가자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백성들의 사기를 돋워 몽골군의 공격에서 충주성을 지켜 냈습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만들어진, 8만 1,352판의 대장경 목판입니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모아 놓은 책을 말하지요.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 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5천만 자가 넘는 글자를 하나하나
판에 새길 때마다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한
고려인들의 간절한 마음이 팔만대장경에 듬뿍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 잡은 이들을
‘권문세족’이라고 합니다. 주로 왕의 측근 세력이거나 몽골어에 능통한 사람,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 등이 포함되었지요. 권문세족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자, 고려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고려의 제31대 왕, 공민왕은 원나라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틈을 타서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몽골풍을 금지하고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등 다양한 개혁 정치를 펼쳤지요. 그러나 권문세족의 저항과
원나라의 간섭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부닥쳤습니다. 공민왕의 죽음으로
개혁 정치는 중단되었지만, 그 업적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원나라의 간섭으로 나라의 힘을 잃어 가던 고려 말기, 북쪽 대륙에서는 ‘홍건적’이, 바다 건너 남쪽에서는 ‘왜구’가 쳐들어왔습니다.
홍건적은 원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한족의 무리를, 왜구는 약탈을 일삼는 일본 해적 무리를 말합니다. 이들의 침입으로 고려 정부는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이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했습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고려 가요는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에 평민들이 즐겨 부른 노래를 말해요.
백성들 사이에서 불렸기 때문에 민속 가요, 즉 ‘속요’라고도 하지요.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 부모에 대한 애정 등을 주제로 다루었으며,
반복적으로 되풀이하여 흥을 돋우는 후렴구를 지닌 것이 특징이지요.
대표적으로 청산별곡 , 가시리 , 동동 등이 전해집니다.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홍진경
최무선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만든 고려 무신입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실험 끝에
그는 화약 만들기에 성공했고, 이후 화통도감에서 다양한 화약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약 무기는 고려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요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세력입니다. 이들은 권문세족과 불교의 부패를 비판하며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막으며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은 중앙 정치에 진출해 주요 세력이 되었지요. 이렇게 고려 말에 새롭게 등장한 두 세력은 쓰러져 가는 나라를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첫 번째 왕입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장군으로 명성을 얻은 뒤 정치에 참여하면서 몰락해 가는 고려를 개혁하려는 마음을 키웠지요. 그러다 신진 사대부와 손을 잡았고,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92년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지요.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중에서도 급진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무너져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지요.
정도전은 조선의 법전인《조선경국전》을 짓고, 한양을 도읍으로 삼아
경복궁을 건설하는 등 조선의 기틀을 닦는 데 여러 공을 세웠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한양은 조선의 도읍지입니다. 한반도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중앙으로 한강이 흘러 교통이 편리하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곳이지요.
또한 인왕산과 북악산 등 큰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유리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명령을 받은 정도전은
유교 정신을 담아 한양의 궁궐과 성곽 등을 설계했습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경복궁은 조선 시대의 궁궐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처음 세운 궁궐이지요.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과 나라의 주요 행사를 치렀던 ‘근정전’ 등 목적에 맞는
다양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궁궐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으나, 오늘날 꾸준한 복원 사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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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을 말합니다.
여기서 ‘신주’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뜻하지요.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이 합해진 말로,
국토와 곡식의 풍요를 위해 지내던 제사를 말합니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 사회이자 농경 사회였던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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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할 때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등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마침내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 되었지요.
태종은 어지러운 조선 초기에 ‘6조 직계제’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켰고,
‘호패법’과 같은 새로운 제도를 실시해 나라의 기틀을 세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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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꼽힐 만큼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습니다. ‘집현전’을 두어 유능한 인재들이 학문을 연구할 수 있게 하였고, 과학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여진족과 왜구를 소탕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였지요. 세종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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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백성 중에 한자를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이에 세종은 보다 많은 백성들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게 하고자 ‘훈민정음’을 만들었지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오늘날에도 쓰이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글자이며
만든 사람과 만든 목적까지 알려진 세계 유일의 글자이기도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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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세종 때 활동한 조선의 대표적인 과학자입니다.
천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재능과 손재주가 뛰어나 궁궐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되었지요. 그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별자리를 관찰하는
기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발명하며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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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는 조선 세종 때 펴낸 책으로, 유교의 도덕을 다루고 있습니다.
‘삼강’은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세 가지의 강령으로, 왕과 신하, 부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지요. 이 삼강에 모범이 되는
충신과 효자, 열녀 등의 이야기를 모아 글과 그림으로 풀어 낸 것이 바로
《삼강행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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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은 조선을 다스리는 데 기준이 된 최고의 법전으로,
조선 제7대 왕, 세조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조선 제9대 왕, 성종 때
완성되었습니다.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법을
다루고 있으며, 나랏일을 하는 왕과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또한
일상생활에서 《경국대전》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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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무려 472년 동안의 방대한 역사가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요. 사관이 왕을 따라다니며 모든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실록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세워 실록을 제작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사고에서 특별히 보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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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의 제10대 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군’이라는 묘호가 붙었습니다.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여러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고,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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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술가입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를 즐겨 그렸을 뿐 아니라,
시 짓기와 글씨 쓰기에도 능해 예술가로서 이름을 남겼어요.
또 조선의 대표 학자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로도 이름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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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을 뜻합니다.
1597년 일본이 재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을 ‘정유재란’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합해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요. 수군과 의병,
백성들이 일본에 맞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7년간의 긴 전쟁 끝에
조선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이 남긴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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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무신,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켜 낸 명장입니다.
거북선을 제작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 등 전쟁에 대비해 온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했습니다.
이순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그가 쓴 《난중일기》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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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는 조선을 대표하여 일본에 보내던 외교 사절단입니다.
두 나라 간의 원만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하였지요.
통신사의 규모는 약 500명 정도였으며, 사신뿐 아니라 화원과 인쇄공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이 포함되었습니다. 통신사는 두 나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거나, 예술과 기술 등 문화를 교류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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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은 조선 시대에 ‘허준’이 쓴 의학서입니다.
1596년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명으로 집필을 시작하여 광해군 때인
1610년 15년 만에 완성했지요. 조선과 중국의 의학서를 모아
내용을 구성했으며, 조선 땅에서 나는 약재로 다양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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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1627년 조선을 침략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이 났지요.
그러나 얼마 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금은, 조선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해 왔습니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1636년 조선을 다시 침입했습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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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는 조선 시대에 널리 쓰인 화폐로, 구리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며 화폐의 필요성이 커지자,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 상평통보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켰지요.
백성들은 점차 화폐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상평통보는
조선의 화폐 중 가장 널리 쓰인 화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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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1대 왕, ‘영조’는 다양한 업적을 남기며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붕당에 상관없이 인재를 골고루 뽑는 ‘탕평책’을
시행하여 조화로운 정치를 꾀했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거나 ‘신문고’를 부활시키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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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세종만큼이나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했고,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워
여러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도록 했지요. 더불어 많은 상인들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등
조선의 개혁을 위해 다양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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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은 정조가 경기도 수원시에 새롭게 성을 쌓아 만든 도시입니다.
신하들의 권력 다툼이 여전했던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도시에서 개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지요. 수원 화성 건설에는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와
‘유형거’ 등 여러 과학적인 기구가 사용되었으며, 수원 화성의 건설 방법은
《화성성역의궤》란 책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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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조선 후기에 ‘실학’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실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문이지요.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박지원은 조선이 청나라의 발전된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집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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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 실학자로,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신하로
지내며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제23대 왕, 순조 때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사건에 휘말리며 유배를 가게
되었지요. 유배 기간 동안 학문에 몰두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책을 남겼고, 농업 중심의 개혁을 외치며 실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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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유행했는데,
두 사람 모두 풍속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김홍도는 해학과 풍자를 담아 백성들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려 냈고,
신윤복은 섬세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로 양반과 여인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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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1811년, 몰락 양반이었던 홍경래가 평안도의 사람들을 모아
지방 차별과 부정부패에 맞서 일으킨 봉기입니다. 당시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 정치’에 빠져 있었어요. 게다가 관청의 부정부패가 심해 백성들의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지요. 이에 맞서 홍경래는 난을 일으켰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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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는 세도 정치와 서양 종교의 유입으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귀히 여기는 평등사상을 강조하였지요. 이에 많은 백성들이 동학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동학교도를 탄압하였고, 결국 최제우도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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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기존의 지도와 지리서를
종합해 만든 전국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산줄기와 하천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다양한 정보가 기호로 담겨 있을 뿐 아니라,
22개의 첩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했어요.
이러한 대동여지도를 통해 조선의 높은 지리학 수준을 알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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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1863년부터 12세의 고종을
대신하여 11년간 조선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세도 정치로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을 몰아내고 부패한 서원을 정리했으며, 양반에게도 군포를 내게 하는 등
다양한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지요. 하지만 경복궁 재건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백성들에게 원성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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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 강대국은 군사력을 앞세워 동양의 여러 나라에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1866년에는 프랑스가,
1871년에는 미국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각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고 하지요. 연이은 서양의 침입에
흥선 대원군은 통상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고, ‘척화비’를 세워 그 의지를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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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은 1876년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에서 맺은 불평등 조약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입니다. 당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과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지요. 이 조약에는 조선이 일본에
세 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게 허가하는 등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ㆍ경제ㆍ군사적인 침략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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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은 1882년에 일어난 구식 군인들의 난입니다. 이들은 평소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요. 참다못한
구식 군인들은 고위 관리들의 집뿐만 아니라 궁궐과 일본 공사관까지
공격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난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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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1884년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치적 투쟁입니다.
급진 개화파는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근대적 개혁을
펼치기 위해 일본 공사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일으켰지요.
거사 이틀 후 급진 개화파는 개화당 정부를 세웠지만, 곧이어
청나라군이 반격해 오면서 갑신정변은 3일 만에 끝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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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수탈하고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농민들을 이끌고 민란을 일으켰지요. 이때 조선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면서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탄압했어요.
그러자 전봉준은 불합리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를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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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이어진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게 군대 철수를 요청했어요.
하지만 이것이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할 기회라고 생각한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공격했지요.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조약을 맺고, 조선 침략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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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 자객들이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을 말합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힘이 막강해지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는 일본에게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라고 압박했지요. 조선 정부는 이 기회에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했어요. 그러자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하던 명성 황후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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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 파천’은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몰래 이동하였고,
약 1년간 그곳에서 지냈어요.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으나, 러시아에게 각종 이권이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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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만에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알리기 위해
1897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왕을 ‘황제’라 하고,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요. 또한 각종 개혁을 추진해
국방력과 황제권을 강화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여러 근대 시설을 도입했습니다. 이 개혁을 ‘광무개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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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인
한반도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고종은 대한 제국의 국외 중립을 선언했지요.
얼마 후, 우려한 대로 러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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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을 앞세워 이 조약을 체결했지요.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 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 제국의 정치와 외교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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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요. 결국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한일 신협약’ 체결을 강요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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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백성들은 항일 의병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의병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요. 유생 출신 의병장이 대다수였지만,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도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를 오가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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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계몽 운동’은 민족의 힘을 키워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신문이나 잡지 등을 발행해
국민들이 근대적 의식을 깨치도록 도왔지요. 그뿐 아니라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힘을 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편, 일본에 경제적으로 얽매이자
일본에 진 빚을 갚아 자립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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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이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일본인과
매국노를 직접 응징하려는 ‘항일 의거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전명운’과 ‘장인환’은 대한 제국의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하였으며,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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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통치’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이루어진 일본의 식민 통치
방식입니다. 일본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헌병 경찰을 내세워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했어요. 또 ‘회사령’을 제정해
기업 설립과 민족 자본 성장을 방해했지요. 강해지는 일본의 억압에
독립운동가들은 국외에 기지를 세워 독립군 양성과 교육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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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대규모의 독립운동입니다.
일본의 무단 통치로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한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만세 운동이지요. 서울 종로에 위치한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점차 한반도 전 지역으로 번져 나갔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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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직후 국내외에 여러 개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정부들은 곧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대한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인정받기 위해 국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군대를 조직하여 군사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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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분열 통치’는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제가 우리 민족을 이간질해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실시한 통치 방식입니다. 3·1 운동 이후 일본은
한국인의 반발을 줄이고자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겠다며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이 정책은 친일파를 기르거나, 식민 통치에 필요한 교육을 시키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이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긴 전투를 말합니다.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들을 만주 지방으로 보냈습니다. 이에 따라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서로 힘을 합쳐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이 전투를 ‘청산리 대첩’이라고 합니다.
3·1 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 학생 단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3·1 운동 이후 일어난 ‘6·10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요. 6·10 만세 운동은 3·1 운동 이후 일본의 강한
억압으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 운동 이후 일어난 최대의 민족 투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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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던 ‘김구’는 일본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비밀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습니다.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은
일본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고위직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이러한 의거 활동은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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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 전쟁을 확대하며 많은 자원이 필요해진 일본은 그 자원을 한국에서
얻기 위해 통치 방식을 ‘민족 말살 통치’로 바꾸었습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을 없애고자 우리말 사용과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하였을 뿐 아니라,
한글 신문을 폐간하고 ‘황국 신민 서사’를 억지로 외우게 했지요.
이러한 통치 방식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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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화 수호 운동’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문화를 지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뜻합니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의 한 방식이었지요. 한글 맞춤법 제정과 한국사 연구, 민족 문화를
강조한 문학 작품 발표 등 선조들의 여러 노력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한글을 쓰고 역사를 배우며 문학을 즐길 수 있는 것이랍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독립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쪽을 소련이, 남쪽을 미국이 통치하는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지요.
많은 사람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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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북위 38도선을 넘은 북한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부근까지
내려왔지요. 이후 남한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서울을 되찾았고,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지며 중단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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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재님들~
그동안 역사만화를 통해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역사만화는 100화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역사 공부는 끝이 없는 거 아시죠?
모두 만재님들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홍진경 #공부왕찐천재 #역사만화
